한밤중에 화재 경보가 울리고 복도에서 탄 냄새가 나면, 일단 신발부터 신고 계단으로 뛰어나가야 할 것 같죠. 그런데 아파트에서는 그게 늘 정답은 아니에요.
먼저 불이 우리 집에서 났는지, 다른 곳에서 났는지를 봐요. 우리 집 불이면 현관문을 닫고 계단으로 대피하고, 현관 쪽이 막혔으면 대피공간·경량칸막이·하향식 피난구로 가요. 다른 집이나 복도에서 난 불인데 우리 집에 연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창문을 닫고 집 안에서 기다리며 119에 신고하는 게 더 안전해요.

불나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 이유
소방청이 올해 4월 낸 보도자료를 보면 최근 3년 동안 아파트 화재가 9,300여 건 났고 사망 115명, 부상 1,148명이 나왔어요. 그중 약 39%가 불이 나지 않은 집에서 대피하다가 생긴 피해였어요.
아파트 불은 대부분 불이 난 집이나 그 층에서 그쳐요. 소방청 등 관계부처가 함께 만든 아파트 입주자 화재 피난행동요령에 따르면 2019~2021년 공동주택 화재의 98.2%가 발화 지점이나 발화층 안에서 끝났고, 여러 층으로 번진 경우는 1.4%였어요.
문제는 연기예요. 계단은 연기가 위로 빠르게 올라가는 통로이기도 하거든요. 2023년 3월 수원의 한 아파트에서는 1층에서 난 불의 연기가 계단실로 번졌는데, 연기가 들어오지 않은 10층 집에서 계단으로 내려가던 주민이 연기를 마시고 숨졌어요.
그렇다고 ‘무조건 집에 있으라’는 말도 아니에요. 우리 집에서 불이 났다면 최선은 빨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상황을 네 가지로 나눠 봐야 해요.
네 가지 경우, 표로 먼저 보기
| 상황 | 할 일 |
| ① 우리 집 불 현관으로 나갈 수 있음 |
대피. 가족에게 알리고, 현관문을 닫고, 계단으로 낮은 자세로 지상층(어려우면 옥상)까지.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고 비상벨·119 신고 |
| ② 우리 집 불 현관 쪽이 막힘 |
구조요청. 대피공간·경량칸막이·하향식 피난구로 이동. 없으면 불·연기에서 먼 곳으로 가 문을 닫고 젖은 수건으로 틈을 막은 뒤 119에 위치를 알림 |
| ③ 다른 곳 불 우리 집에 연기·불길 없음 |
대기. 집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창문을 닫고, 119 신고 후 안내방송에 따름 |
| ④ 다른 곳 불 우리 집에 연기·불길이 들어옴 |
대피 또는 구조요청. 복도·계단에 연기가 없으면 ①처럼 대피, 있으면 ②처럼 구조요청 |
여기서 ‘다른 곳’은 다른 집만이 아니에요. 복도, 계단실, 엘리베이터 홀, 주차장에서 난 불도 포함돼요.
③에서 기다리는 중이라도 연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바로 ④로 넘어가요. 한 번 정한 행동을 끝까지 고집하지 말고, 창밖과 현관 틈을 계속 살펴 주세요.
현관문 열기 전에 손등부터 대 보세요
①이나 ④에서 밖으로 나갈 때 지킬 것이 몇 가지 있어요. 순서대로 보면 이래요.
- 현관문 손잡이를 잡기 전에 손등으로 문이 뜨거운지 확인해요. 뜨겁다면 문 너머에 불길이 있을 수 있어요.
- 나온 뒤에는 현관문을 꼭 닫아요. 불난 집 문이 열려 있으면 연기가 계단을 타고 윗집들로 한꺼번에 올라가요.
-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아요. 뜨거운 연기가 승강로를 타고 들어오거나 정전으로 멈춰 갇힐 수 있어요.
- 연기는 위로 모이니 최대한 낮은 자세로 계단을 내려가요.
- 복도의 비상벨을 누르고 119에 신고해요.
복도식 아파트는 보통 계단이 양쪽에 있어서, 가까운 계단에 연기가 차 있으면 반대편 계단으로 가요. 계단식은 대개 한쪽뿐이라 계단에 연기가 있으면 억지로 내려가지 말고 ②의 방법으로 바꿔요.
현관이 막혔다면, 베란다를 떠올리세요
현관 앞에서 불이 나면 집 안에 갇히게 돼요. 매뉴얼에는 2019년 9월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현관 쪽 거실에서 전동킥보드를 충전하다 불이 나, 현관이 막혀 부부가 빠져나오지 못한 사례가 실려 있어요. 현관 주변에 짐을 쌓거나 충전기를 꽂아 두지 않는 것도 대피 준비예요.
이럴 때 쓰라고 만든 시설이 베란다(발코니)에 있어요. 집마다 셋 중 하나가 있거나,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어요.
| 시설 | 어떻게 생겼나 | 불났을 때 | 평소에 할 일 |
| 대피공간 | 베란다 쪽에 방화문이 달린 작은 방. 우리 집만 쓰면 2㎡ 이상, 옆집과 같이 쓰면 3㎡ 이상 | 들어가서 문을 닫고 틈을 막은 뒤 119에 구조 요청 | 창고로 쓰지 않기, 짐 쌓지 않기 |
| 경량칸막이 | 베란다에서 옆집과 맞닿은 벽 중 9mm 안팎 석고보드 같은 얇은 판 | 발이나 몸, 도구로 부수고 옆집으로 대피 | 앞에 수납장·붙박이장·짐 두지 않기 |
| 하향식 피난구 | 베란다 바닥의 네모난 덮개. 열면 아래층으로 사다리가 내려가요 | 덮개를 열고 사다리를 끝까지 펼친 뒤 아래층으로 대피 | 덮개 위에 화분·빨래 바구니 두지 않기 |
대피공간 넓이는 건축법 시행령 제46조 기준이에요. 대피공간은 바깥 공기와 닿아 있고 60분 방화문으로 집 안과 나뉘어 있어서, 잠시 불과 연기를 피해 구조를 기다리는 곳이에요.
하향식 피난구 덮개를 열면 경보가 울리는 구조라, 평소 궁금하다고 열어 보면 경보음이 울릴 수 있어요. 위치와 덮개 위가 비어 있는지만 확인해 두세요.
셋 다 없다면 불과 연기에서 먼 방이나 베란다로 가서 문을 닫고, 젖은 수건이나 테이프로 문틈을 막아요. 베란다에서 밖에 내 위치를 알리는 것도 방법이에요.

우리 집엔 뭐가 있을까? 지어진 시기로 짐작하기
어떤 시설이 있는지는 아파트가 지어진 시기와 구조에 따라 달라요. 규정이 바뀐 시점을 알면 어디부터 볼지 짐작할 수 있어요.
| 시점 | 바뀐 것 |
| 1992년 7월 | 3층 이상 베란다의 옆집과의 벽을 부수기 쉬운 경량구조나 피난구로 만들 수 있게 됨 |
| 2005년 12월 | 발코니 확장이 합법화되면서 대피공간 설치 기준이 생김 |
| 2010년 2월 | 하향식 피난구 설치 기준이 마련됨 |
| 2014년 12월 | 경량칸막이·피난구를 두면 알아보기 쉬운 곳에 표지를 붙이도록 함 |
1992년과 2014년 내용은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제14조, 2005년과 2010년 시점은 부산소방재난본부 안내를 따랐어요.
다만 표는 짐작용이에요. 1992년 규정은 경량구조로 ‘할 수 있다’는 내용이라 그 시기 아파트라고 모두 경량칸막이가 있는 건 아니에요. 요즘 아파트도 4층 이상에서 대피공간 대신 경량칸막이나 하향식 피난구를 두는 경우가 있고요. 그래서 결국 눈으로 확인하는 게 제일 확실해요.
- 베란다에서 옆집과 맞닿은 벽이 매끈한 판으로 되어 있고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지
- 벽이나 문에 경량칸막이·대피공간 표지가 붙어 있는지
- 베란다 바닥에 네모난 덮개가 있는지
- 베란다 끝에 방화문이 달린 작은 공간이 있는지
- 창가에 완강기 보관함이 있는지
찾아봐도 모르겠으면 관리사무소에 ‘우리 동 몇 호 라인은 피난시설이 어디 있나요’라고 물어보면 돼요. 소방서에서도 경량칸막이 자리에 붙박이장이나 수납장을 들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어요.
옥상으로 가도 될까요?
매뉴얼은 계단으로 지상층까지 내려가기 어려울 때 옥상을 대피 장소로 안내해요. 문제는 옥상 문이 잠겨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2016년 2월 29일 이후 사업계획승인을 받은 아파트는 옥상 출입문에 비상문 자동개폐장치를 달아야 해요. 평소엔 잠겨 있다가 불이 나면 소방시설과 연동돼 자동으로 열리는 장치예요. 그보다 앞서 지어진 단지는 의무가 아니라서, 관리사무소에 옥상 문이 화재 때 열리는지 미리 물어 두는 게 좋아요.
119에는 이렇게 말하면 돼요
당황하면 주소부터 막혀요. 순서는 위치 → 상황 → 지금 있는 곳과 사람 수예요. 매뉴얼의 예시를 조금 줄이면 이래요.
- “○○구 ○○동 ○○아파트 ○○동 ○○호예요.”
- “우리 집에서 불이 났는데 현관으로 못 나가요.” 또는 “○층에서 불이 났는데 우리 집엔 연기가 안 들어와요.”
- “지금 대피공간(베란다)에 가족 세 명이 있어요.”
그다음부터는 119 상황요원의 안내와 단지 안내방송을 따르면 돼요.
오늘 저녁 10분이면 되는 준비
- 가족과 네 가지 경우를 한 번 같이 읽어요.
- 베란다에서 대피공간·경량칸막이·하향식 피난구 위치를 찾고, 앞에 쌓인 짐을 치워요.
- 현관에서 계단까지 가는 길과 반대편 계단이 있는지 확인해요.
- 관리사무소에 옥상 문이 화재 때 열리는지 물어봐요.
- 소방청 매뉴얼 권고대로 상반기·하반기 한 번씩 가족이 함께 대피 연습을 해요.
집 평면도를 간단히 그리고 피난시설 자리를 표시해 두면 아이들도 금방 기억해요. 매뉴얼 원문은 소방청 누리집에서 내려받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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